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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스완과 주인공의 만남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제1부에서 주인공이 스완의 집을 방문하는 장면(3권 138-203쪽)은 「스완의 사랑」의 후일담에 해당하며 소설 전체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부분입니다. 스완과 주인공이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어긋나는지 살펴보면 주인공의 글쓰기 소명 탐색이 어디쯤 와 있는지 가늠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문제는 주인공의 앞 세대 인물로서 스완의 위상입니다. 스완은 주인공에게 영향을 주는 모델이기도 하고, 주인공이 장차 하려는 일에서 좋은 선례를 보이지 못한 실패자이기도 합니다. 일종의 부정적 모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프루스트가 이런 유형의 인물을 어떻게 다루는지 보겠습니다.

주인공은 짝사랑의 긴장에 사로잡혀 잔뜩 얼빠진 모습만 보이지만, 스완은 그런 주인공을 나름 똑똑하게 보았는지 자꾸 무언가를 가르쳐주려 합니다. 하지만 그의 교육은 소용이 없습니다. 스완의 예술 수업(150-151). 스완은 주인공을 서재로 불러 수집품을 보여주지만, 처음으로 질베르트의 초대를 받은 주인공은 예술 수업을 받을 정신이 아닌 듯합니다. 스완의 사교계 수업(154-155, 205-206). 이 단락들은 스완이 사교계에서 전락했다는 사실을 독자에게 암시해주긴 하지만, 주인공은 역시 아무 정신이 없습니다. 요컨대 두 사람의 만남은 교육이란 측면에서 보면 좀 허망하게 어긋나는 셈입니다.

더 읽다보면 주인공은 스완 부인이 연주하는 뱅퇴유의 소나타를 감상합니다(3권 183-193쪽). 지난 시간에 3권 초반 노르푸아 장면부터 글쓰기 소명이라는 문제가 미적 경험의 문제로 치환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렇다면 스완이 들었던 소나타를 주인공이 듣는 이 장면이 스완과 주인공을 연결하는 핵심적인 고리라고 짐작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주인공이 뱅퇴유의 소나타를 어떻게 들었는지는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처음 들었을 때는 이해를 못 했는데 원래 음악 작품이란 처음 들을 때는 이해할 수 없는 법이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작가는 화제를 피해갑니다(스완의 첫 번째 감상은 그렇게 상세하게 서술했으면서). 다만 뱅퇴유 소나타에 대해 스완이 하는 말은 흥미롭습니다. 스완은 「스완의 사랑」에서 얻은 철학적인 깨달음을 다 버리고, 자기 기억을 환기시켜주는 기능만 생각합니다. “나는 단지 이 젊은이에게 음악이 보여주는 것에 대해서 – 적어도 내게서 – 말하고 있소. 그것은 ‘의지 자체’나 ‘무한의 종합’ 같은 것은 아니고, 이를테면 아클리마타시옹 공원 야자수 재배용 온실에서의 프록코트를 입은 베르뒤랭 영감 같다고나 할까.”(191-192) 이 장면에서 일단은 예술을 포기한 스완의 타락을 볼 수 있겠습니다. 음악에서 예술에 대한 본질적인 깨달음을 추출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개인적 추억에 연결시키고, 뿐만 아니라 자기 추억을 제대로 되살리지도 못해 왜곡하기까지 하니 말입니다(스완 씨, 소악절의 추억은 솔직히 그런 게 아니었잖아요). 스완을 자기 글을 쓰는 데 실패한 사람이라고 규정한다면, 그 실패를 확인하는 장면이 이 장면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스완을 부정적 모델로 보는 관점이 틀렸다고 볼 수는 없지만, 스완은 이러이러해서 잘못됐고, 반면에 주인공은 그의 오류를 극복해서 성공한다고 단정하는 이분법은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두 대목을 살펴봅시다.

1) “스완의 이 말은 나중에 내가 ‘소나타’를 잘못 이해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찾아보라고 암시한 사실을 배제하기에 음악은 지나치게 포괄적이기 때문이다.”(190) 서술자에 따르면 스완은 자기 경험을 말했을 뿐이며, 문제는 그의 경험이 다른 사람에게도 통한다는 법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주인공의 첫 번째 소나타 감상에서 오해가 있었다면, 오해의 주체는 주인공 자신입니다. 

2) 달빛에 대한 스완의 말은 음악이 얼마나 정밀하게 시각적 이미지를 환기할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소악절에 그토록 잘 묘사된 것도 바로 그 점이라네, 마비 상태에 빠진 불로뉴 숲. 바닷가라면 더 인상적이지, 왜냐하면 나머지 다른 것은 전혀 움직이지 않아 미세한 바다 물결의 파동이 더 잘 들리니까. 파리에서는 이와 반대라네. 기껏해야 역사 기념물 위에 비치는 기이한 미광, 빛깔도 위험도 없는 불길로 밝혀진 듯한 하늘, 우리 모두가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 거대한 삼면기사 같은 것뿐이라네. 그러나 뱅퇴유 소악절, 더욱이 소나타 전곡을 통해 묘사된 것은 그런 게 아닐세. 그것은 불로뉴 숲을 배경으로 하며, 그루페토가 연주될 때 누군가가 ‘거의 신문을 읽을 수 있을 정도구나.’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뚜렷이 들린다네.”(189-190) 달빛이 서로 다른 장소에서 어떻게 다르게 지각되는가, 예사로운 감각이 아닙니다. 동시대의 인상주의 회화가 빛에 따라 사물이 다르게 보인다는 사실을 탐구했다면, 스완은 비추는 사물에 따라 빛 자체가 다르게 보인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여기서 드뷔시의 음악을 연상해도 좋습니다. 드뷔시 작품에서는 정확하고 정밀한 묘사가 음악의 현대성과 관계가 있습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예술가의 감각적 체험을 있는 그대로 세밀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형식적 틀이나 관습적 음악 언어를 때로는 포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쯤에서 함께 고려할 점은 「스완의 사랑」에서 스완이 음악에 대해 깨달은 것들이 프루스트에게 결코 최종적인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앞 포스팅의 두 번째 댓글에 상세히 설명해 놓았습니다). 생퇴베르트 살롱에서 뱅퇴유 소나타가 연주되는 장면은 기본적으로 스완의 시점에서 서술됩니다. 서술자가 직접 나서서 음악이란 이러이러하기 때문에 초자연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계시라고 주장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서술자는 스완이 이러이러한 것을 깨달았는데, 그 깨달음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고 말하는 데 그칩니다. 그러면 스완의 깨달음은 저 장면 안에서, 스완이 사랑에 빠져 고통을 받는 맥락 안에서 옳은 것이지, 절대적으로 옳다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매번 강조하지만 소설 속에는 절대적으로 옳은 생각이라는 게 없습니다. 틀리지 않았다는 말은 다른 답도 있을 수 있다는 뜻이지요. 소설의 세계는 언제나 다른 답의 가능성이 있는 세계입니다. 또한 4권에 예고되듯이, 주인공은 스완처럼 형이상학적인 음악미학의 영향을 받지 않으며, 음악에 대해서 뭔가 다른 관점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어떤 결론을 낼 수 있을까요? 스완이 2권에서 깨달은 것이 틀리지 않았다면, 3권에서 그 깨달음을 잊어버렸다고 해서 역시 틀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스완은 이 장면에서 음악의 형이상학적인 힘이라는 낭만주의적인 관점을 포기하고, 대신 음악의 정확한 묘사능력이라는 드뷔시적이고 보다 현대적인 관점을 암시합니다. 「스완의 사랑」의 깨달음은 낡은 사고방식이란 걸 스완 자신도 인정한 것이지요. 빛과 같은 거의 ‘비물질적인’ 감각적 대상을 어디까지 세밀하게 관찰하느냐는 문제가 걸려있다는 점에서, 스완의 말은 프루스트 자신의 미학을 예견하기도 합니다(1권 66쪽의 달빛 묘사를 다시 읽어봅시다!). 스완이 뱅퇴유 음악에 대해 늘어놓는 이야기들은 나름 일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소년 주인공이 나아갈 길을 예언하기도 하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스완을 오로지 부정적 모델로 규정하기는 어렵고, 긍정적인 모델로 볼 수 있는 여지도 있겠습니다.

여기서 조금만 더 생각을 해 봅시다. 방금 저는 스완의 말에 일리가 있고 예언적인 성격도 있다, 스완이 긍정적인 모델일 수도 있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이런 주장을 확신을 가지고 학문적으로 타당한 형식을 갖춰 개진하기는 어렵습니다. 소설의 서술자는 스완이 이전에 얻었던 귀중한 깨달음과 예술적 열정을 버리고 지리한 일상생활에 매몰되어 있다고 서술합니다. 스완 본인도 자기가 음악의 역사가 어떻게 흘러가는지에 대해 본질적인 통찰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못 하지요. 주인공 역시 3권에서 스완에게 명시적으로 배우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요컨대 이 장면의 스완의 발언에서 음악사의 흐름, 낭만주의에서 인상주의를 거쳐 현대로 가는 흐름을 구성하는 것은 온전히 독자의 몫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물어올 수 있겠지요. 자의적인 해석, 또는 과잉해석이 아닌가. 하지만 스완이 한 말, 책에 나오는 말을 소설의 맥락과 연관 지어 재구성했다면, 그것은 근거가 있는 해석입니다. 문학의 독자는 이런 해석을 할 권리가 있습니다. 이것이 롤랑 바르트가 「저자의 죽음」에서 내리는 결론이기도 합니다. 스완이 앞으로 주인공이 갈 길을 그에게 직접 가르쳐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독자들은 스완의 말을 재구성하는 독서를 통해 주인공의 앞날을 점쳐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스완의 말에 나름의 일리와 통찰이 있다는 명제도 나름 타당한 해석이라고 해 둡시다. 

스완을 긍정적인 모델로 보는 해석에 나름의 타당성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스완은 어떤 인물인가, 긍정적인 인물인가 부정적인 인물인가, 설명이 답답하게 느껴지는 분들도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글은 그런 답답함을 노린 것이기도 합니다. 스완은 분명히 부정적인 모델이지만, 그렇다 해서 주인공이 반박하고 극복해서 잊어버려야 할 인물도 아닙니다. 이것은 프루스트의 인물들이 가진 중요한 특징입니다. 프루스트의 세계에서 부정적인 모델이 오직 부정적이기만 하거나, 악역이 오직 악하기만 한 경우를 찾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프루스트는 가장 잔인한 인물이 내비치는 충동적인 연민을, 귀족적인 인물의 난데없는 비굴함을, 명석한 인물의 이해하기 어려운 맹목을 즐겨 묘사합니다. 그리고 남자다운 인물의 여성성을, 부정적인 모델의 예언적인 통찰력을. 나아가 저는 스완을 부정적 모델로 단정하기 어려운 이유들을 찾아보는 작업이 소설 읽기를 조금 더 입체적으로 만든다고 제안하고 싶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글쓰기 소명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살펴본다고 했었는데, 소명을 찾아나가는 과정 하나하나를 한 탄씩 깨 나가는 게임처럼 취급하는 독서는 소설의 입체성을 납작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물론 프루스트의 소설은 소명의 실현을 위한 창작의 이론을 탐색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작품을 써야 한다, 시간을 되찾아야 한다, 삶의 의미를 밝혀야 한다, 소설은 이런 당위를 위해 무엇은 옳고 무엇은 틀렸는지 가려내는 과정으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유럽인문아카데미 <프루스트 함께 읽기I> 세미나 보충 자료입니다.

10월 7일(목) 세미나에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외젠 앗제Eug&egrave;ne Atget, <불로뉴 숲Bois de Boulogne>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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