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소희 피아노 독주회, 2024년 3월 24일, 서울 아람아트홀
포레 녹턴 op. 63 / 쇼팽 발라드 op. 38 / 폴로네즈 op. 44 / 슈만 후모레스케
곡에 대해 두 가지를 배웠다. 하나는 쇼팽 발라드 2번의 갈라진 두 세계가 평온과 격동으로 손쉽게 정리되지 않는다는 점. 장조 도입부를 연습하며 사람들은 6박자 리듬과 4성부 화음, 노래의 연속성과 음색의 다양성을 분석하게 마련이지만 그렇게 닿을 수 있는 건 다만 연출된 평온이 아닐까 생각했다. 신소희의 선율에는 그런 요소들로 풀어지지 않는, 마치 잠들기 어려운 밤과 같은 억양이 있었고 그 억양은 지식으로 다듬은 것이 아니었지만 자신을 드러내려 무리하지도 않았다. 억양이 강세를 필요로 한다면, 신소희의 강세는 타인을 자극하기보다 스스로의 긴장을 떨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F장조가 더 불안하고 A단조의 격동에서 차라리 안도감이 들 수 있다. 그렇게 연주자는 두 세계의 갈라짐을 도식적으로 강조하기보다는, 두 세계를 하룻밤의 이면으로 만드는 하나의 목소리를 찾으려 했던 것 같다. 코다의 특별한 힘이 거기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민족주의적 해석에 의거하는 패배의 서사가 아니라 그저 음악이,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음악이 가게 되어 있는 길인 것이다.
다른 하나는 슈만 후모레스케의 혼란은 산만이 아니라는 점. 여기서 피아니스트는 끊임없이 어디론가 불려나가야 하는 자아다. 낯선 꿈 속으로 들어가면 주선율이 무엇이고 곡의 성격이 무엇인지 알고 준비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없는 집중력과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그것이 작품의 통일성이다. 이 무자비한 소환을 어떻게든 버텨내려는 긴장에서 어떤 노래들, 특히 G단조의 노래들이 치밀어 오른다. 그런 곳에서 신소희의 연주는, 이보다 더 아름다운 음색을 만들 수는 있겠지만 이만큼 솔직한 목소리를 내기는 어려웠다고 생각한다. 나로서는 후모레스케가 청년의 음악이라는 사실을 멀리 돌아 깨달은 것 같다. 오늘 들은 연주가 악상의 혼란을 멀리 놓고 조감하기보다는, 눈앞에 가까이 놓고 과감하게 파헤치는 스타일에 가까웠던 덕분이다. 사실 연주자 스스로는 아쉬웠을지 모르고 음악 선생들이 보기에는 지적해야 할 점이다. 더 멀리 전체를 보라고 권하는 것이 가르침의 몫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선생들이 이만큼 나를 곡에 빠져들게 만들 수 있을까? 더구나 음악이 멀리 볼수록 멀어지는 지평선일 뿐이라면...
연주에 대해 한 가지를 생각했다. 음악에서 슬픔을 전하는 것은 슬픔을 표현할 줄 안다는 것과 다르다. 너무나 능숙하게 표현할 줄 알기 때문에 공허해지는 연주자들이 있다. 너무 많은 자의식에 눌려 감정이 자랑으로 변하는 연주자들이 있다. 반면 나는 오늘 저 겸손하고 성실한 연주자에게 말로 빚어본 적 없는 슬픔이 많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한 시간 내내 난데없이 슬픔에 대해 생각했다. 포레의 Db장조 녹턴에서 쇼팽의 F#단조 폴로네즈가 왜 하나의 슬픔으로 이어지는지 생각했다. 상처가 벌어지는 발라드 앞뒤로 두 곡을 배치한 선택이 절묘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연주자는 기교를 과시하지 않듯 슬픔을 연출하지 않는다. 다만 어떤 부분들을 숙명적으로 들리게 만든다. 폴로네즈 중간부의 회전하는 악구를 강박적인 반복으로 들리게 만드는 리듬 처리, 이것은 혼자 있을 때의 두려움이다. 폴로네즈가 아무리 정치적인 장르라도 쇼팽의 음악은 투쟁을 연기하는 배우들의 몫이 아닌 것이다.
오늘 연주가 가끔 어딘가 쫓기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면 연주자가 기술적 수단을 통제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음악 앞에서 가면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주를 하면서 어떤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욕망을 버리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피아노를 잘 치는 사람, 기술과 음악성을 구별할 줄 아는 사람, 젊은 날의 감정을 관조할 줄 아는 사람, 심지어 몰입과 자유로움도 한낱 가면일 수 있다. 불안에 회피의 제스처를 섞지 않고 두려움을 두려움 없이 드러낼 수 있는 건 드문 재능이다. '솔직한 표현'과는 결이 다른 신소희의 그런 솔직함은 앙코르였던 드뷔시 달빛도 예외가 아니었다. 나는 지금 이 멜로디를 쳐야 해, 이건 말로 옮길 수 없지만 나의 이야기니까. 그런 친구의 말없는 말을 듣는 데 달밤의 풍경은 중요하지 않다. 사실 음악 앞에서 가면을 쓰지 않는다는 게 무엇인지 나로서는 잘 설명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분명히 짐작할 수 있는 것도 있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음악으로부터 진정한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