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뱅퇴유 소나타의 모델들

proust 2021. 9. 26. 13:27
친구여,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모델['열쇠clef']는 없습니다. 혹은 인물 하나에 여덟 명이나 열 명의 모델이 있지요. 콩브레의 성당도 마찬가지요. 기억 속에서 수많은 성당들을 '모델'로 (포즈를 취하도록) 빌려 왔어요. 어떤 성당들인지 말해드리기도 이제 어렵소. 성당의 포석이 생 피에르 쉬르 디브의 것인지, 리지외의 것인지도 기억이 안 납니다. 스테인드 글라스 중에서는 에브뢰에서 온 것도 있고, 생트 샤펠이나 퐁 오드메르에서 온 것도 있다오. 소나타에 관해서라면 더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실제 작품이 내게 소용이 된 한에서 말하자면, 사실 별로 소용이 되지 않기는 했지만, 또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긴 한데, (끝에서부터 시작해 봅시다) 생퇴베르트 야회에 나오는 소나타의 소악절은 내가 안 좋아하는 음악가 생상스의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에 나오는 예쁘장하지만 별 볼 일 없는 악절입니다. (어떤 구절인지 정확히 집어서 말해드릴 수 있는데, 여러 번 나오기도 하고 또 자크 티보가 훌륭하게 연주했지요). 같은 야회의 조금 뒤에 가서 소악절 이야기를 할 때 내가 <성 금요일의 마법>을 생각했다 해도 놀라운 일은 아닐 거요. 역시 같은 장면입니다만, 피아노와 바이올린이 서로 응답하는 두 마리 새처럼 흐느끼는 대목에서 나는 프랑크의 소나타(특히 에네스쿠가 연주한 것)를 생각했는데, 다음 권들 중에 한 권에는 프랑크의 사중주가 나옵니다. 베르뒤랭 집에서 소악절을 덮고 있는 트레몰로는 <로엔그린>을 듣고 떠올린 건데, 여기서 소악절 자체는 슈베르트의 한 대목이기도 하지요. 역시 베르뒤랭 야회에서 소악절은 넋을 빼놓을 듯한 포레의 어느 피아노곡이기도 하다오.
- 자크 드 라크르텔에게 보낸 편지, 1918년 4월 20일

 

프루스트는 자신이 말하는 것보다 더 실제 작품들에 의존했다. 소설의 초고에는 생상스와 바그너의 곡이 실명으로 등장한다. 스스로 음악을 들은 경험을 바탕으로 삼아 인물의 경험을 구체적으로 서술하려는 것이다. 1909년에 쓴 <스완의 사랑>의 초고에서 소악절은 카미유 생상스의 바이올린 소나타 1번 1악장에 등장하는 제2주제이다. <되찾은 시간>의 1910년 초고에는 소설의 주인공이 바그너의 음악극 <파르지팔>의 한 대목인 <성 금요일의 마법>을 듣는 장면이 나온다. 1911년, 프루스트는 어떤 이유에선지 바그너에 관한 단락을 <스완의 사랑>의 마지막 소나타 장면(생퇴베르트 연회)으로 옮긴다. 이 원고에서 생상스와 바그너의 이름은 사라지고, 소나타는 허구의 작곡가가 쓴 존재하지 않는 작품이 된다.

 

생상스와 바그너, 19세기 중후반의 음악사에서 이만큼 대조적인 사람들을 찾을 수 있을까? 앞의 편지에서만 해도 여섯 개나 되는, 너무나 이질적인 모델들을 반영하고 있으므로 뱅퇴유 소나타의 정체와 통일성에 대해 의문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프루스트는 글 쓰는 솜씨를 자랑하고 있을 뿐이라고, 처음과 끝과 일관성을 갖춘 음악 작품을 염두에 두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따라서 소나타 장면들이 내비치는 음악에 대한 생각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고 주장하는 비평가들도 많았다. 하지만 1911년에서 1913년에 걸친 퇴고 과정을 꼼꼼히 살펴본다면 좀 다른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프루스트는 생상스 소나타와 <파르지팔>을 합침으로써 뱅퇴유의 허구적 음악이 떠안게 된 구성상의 난점을 눈치채고 있었고, 스완이 감상하는 소나타가 하나의 완결된 작품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 세심한 노력을 기울였다.

 

하나의 소나타는 분위기의 꾸준한 흐름, 나름의 논리적인 전개, 계속해서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돌아오는 반복적인 요소들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프랑크에 대한 참조 역시 그런 방향에서 읽을 수 있다. 1913년 4월의 어느 저녁, 프루스트는 세자르 프랑크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제오르제 에네스쿠의 연주로 듣는다. 감동을 많이 받은 모양이다. 4악장의 인상을 작가는 집에 돌아와서 수첩에도 적고, 친구에게 편지로도 써 보내고, 한두 달 뒤에는 이날 써둔 문장을 때마침 도착한 <스완의 사랑>의 교정지에도 적어 넣는다. 자전적 이야기를 즉흥적으로 삽입하면서 별 계획 없이 글을 쓰고 있다는 증거일까? 하지만 창작의 마지막 단계에서 우연한 만남에 부딪쳐 드러나는 전체에 대한 통찰도 있다(프루스트는 <갇힌 여자>에서 이 이야기를 할 것이다).

 

프루스트가 새들의 대화에 비견한 프랑크 소나타의 카논canon은 음악의 세계에 순수한 필연으로 보일 만큼 엄정한 논리가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준다. 스완을 매혹했던 소악절은 온전히 그 세계의 논리 속에서 마지막으로 피어나고 사라진다. 소나타의 주제들은 인연을 따라 제각각 다른 아픔에 물들어 되돌아오고, 인연이 다한 음악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그날 저녁 이후로 스완은 그에 대한 오데트의 감정이 결코 되살아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또 행복에 대한 그의 희망이 더 이상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2권 283쪽)

 

그러면 음악을 들어보자.

 

1. 카미유 생상스Camille Saint-Saëns, 바이올린 소나타 제1번 D단조, 작품번호 75

André Pascal (vn), Isidor Philipp (pf). '소악절': 1분 24초-1분 57초/3분 20초-3분 54초/5분 35초-6분 8초

"생상스의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에 나오는 예쁘장하지만 별 볼 일 없는 악절"

"이제야 그는 음향의 파도 위로 잠시 솟아오른 악절을 뚜렷이 식별할 수 있었다. 악절은 금방 그에게 특별한 쾌락을, 그것을 듣기 전에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쾌락을 주었는데, 악절 외 다른 어떤 것도 그런 쾌락을 맛보게 해 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악절에 대해 미지의 사랑과도 같은 그 무엇을 느꼈다." (2권 46-47쪽)

"그러나 갑자기 그녀가 들어온 것처럼, 그 출현이 얼마나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주었던지, 스완은 가슴에 손을 가져가지 않을 수 없었다. 바이올린이 고음으로 올라가 마치 무엇을 기다리듯 머물러 있었다. 기다림은 오래 지속되었고, 바이올린은 자신이 기다리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이미 알아보고, 대상이 다가오길 기다리는 흥분 속에서, 자기 곁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다가 숨지기 전에 그 대상을 맞이하려는 듯, 또는 놓으면 금세 닫히는 문을 간신히 지탱하듯 마지막 힘을 다해 그 대상이 지나갈 수 있도록 잠시 길을 열어 주기 위한 절망적인 노력으로 고음을 이어 갔다. 스완이 그 곡을 알아보고 '뱅퇴유 소나타 소악절이구나, 듣지 말자!'라고 말하기도 전에, 오데트가 그를 좋아했던 시절의 모든 추억들이, 그때까지 그의 존재 가장 깊은 곳에 보이지 않도록 간직해 왔던 모든 추억들이, 사랑하던 시간의 그 갑작스러운 빛에 속아 사랑이 돌아온 줄 알고 잠에서 깨어나 날개를 치며 올라와서는 현재 그의 불행 따위는 아랑곳없이 잊어버렸던 행복의 후렴구를 미친 듯이 노래하기 시작했다." (2권 269-270쪽)

 

2.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파르지팔Parsifal>, 제3막, <성 금요일의 마법Karfreitagszauber>

Radio-Sinfonieorchester Stuttgart, Carl Schuricht (cond).

"같은 야회의 조금 뒤에 가서 소악절 이야기를 할 때 내가 <성 금요일의 마법>을 생각했다 해도 놀라운 일은 아닐 거요."

"연주자들은 소악절을 연주한다기보다는 악절이 출현하기 위해 요구하는 의식을 거행하는 것처럼 보였고, 또는 혼을 불러내는 기적을 실현하고 잠시 그 기적을 연장하기에 필요한 주문을 읊조리는 듯 보여, 스완은 마치 악절이 자회선의 세계에 속하기라도 한 것처럼, 더 이상 그것을 볼 수 없었다. 그러다 악절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자 일시적으로 실명한 듯, 그 안에서 변신의 신선함을 맛보았다." (2권 274쪽)

"물론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악절은 인간적이었지만, 초자연적인 존재들의 세계에도 속했다. 이제까지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그럼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탐색자가 이 성스러운 세계에 접근하여 그중 하나를 사로잡아서는 잠시 지상에서 빛나게 할 때면, 우리는 그것을 알아보고 매혹되는 법이다. 이것이 바로 뱅퇴유가 소악절을 통해 이룬 것이었다." (2권 279쪽)

 

3. 세자르 프랑크César Franck, 바이올린 소나타 A장조, 4악장 Allegretto poco mosso

Jacques Thibaud (vn), Alfred Cortot (pf).

"피아노와 바이올린이 서로 응답하는 두 마리 새처럼 흐느끼는 대목"

"마지막 악장의 시작 부분에서 스완이 들은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아름다운 대화는, 인간의 말을 없애면 환상이 지배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런 환상마저 제거했다. 입으로 말해지는 언어가 이렇듯 완강하게 필연성이 되어 본 적이 없었으며, 이 정도로 적절한 질문과 명확한 대답 체계를 인식한 적도 없었다. 먼저 고독한 피아노 소리가 짝에게 버림받은 한 마리 새인 양 탄식했고, 바이올린이 그 소리를 듣고 옆 나무에 있는 듯이 대답했다. 마치 태초에 지상에는 아직 두 사람밖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아니, 조물주의 논리에 따라 나머지 모든 것에는 닫힌 그 세계, 즉 소나타 세계에는 앞으로도 영원히 두 사람만이 존재한다는 것처럼." (2권 280쪽) 

 

4. 리하르트 바그너, <로엔그린Lohengrin>, 제1막 전주곡

Wiener Philharmoniker, Wilhelm Furtwängler (cond).

"베르뒤랭 집에서 소악절을 덮고 있는 트레몰로는 <로엔그린>을 듣고 떠올린 건데"

"처음에 그는 악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의 물질적인 질감밖에 음미하지 못했다. 그러다 가느다랗고 끈질기고 조밀하며 곡을 끌어가는 바이올린의 가냘픈 선율 아래서, 갑자기 피아노의 거대한 물결이 출렁거리며 마치 달빛에 홀려 반음을 내린 연보랏빛 물결처럼, 다양한 형태로 분리되지 않은 채 잔잔하게 부딪치며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을 때 커다란 기쁨을 느꼈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 윤곽을 분명히 구별하지도 못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어떤 이름도 붙이지 못한 채 갑자기 매혹된 그는, 마치 저녁나절 습기찬 공기 속을 감도는 장미 냄새가 우리 콧구멍을 벌름거리게 하듯이, 지나는 길에 그의 영혼을 크게 열어 준 악절 또는 화음을―그는 어느 것인지 알지 못했다―받아들이려고 애쓰고 있었다." (2권 45쪽)

 

5. 프란츠 슈베르트Franz Schubert,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환상곡 C장조, D. 934

Adolf Busch (vn), Rudolf Serkin (pf). 트레몰로: 3분 33초까지

"여기서 소악절 자체는 슈베르트의 한 대목이기도 하지요."

"피아니스트는 두 사람을 위해 그들 사랑의 국가와도 같은 뱅퇴유의 소악절을 연주했다. 피아니스트는 바이올린의 트레몰로 지속음에서 시작했는데, 몇 소절 동안은 트레몰로만이 전면을 가득 채우며 홀로 들리다가 갑자기 멀어지는 듯하더니, 마치 살짝 열린 문의 좁은 틈으로 깊숙히 원경이 보이는 피터 데 호흐의 그림에서처럼, 아주 멀리에서 다른 색조를 띠고 스며든 비단 빛 같은 질감으로, 소악절이 춤을 추는 목가풍 삽화 같은 모습으로, 마치 다른 세계에 속하듯 끼어들었다. 그 소리는 단순하지만 불멸의 물결이 되어, 여기저기 우아함을 선물로 나누어 주며 똑같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지나갔다." (2권 61쪽)

 

6. 가브리엘 포레Gabriel Fauré,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발라드Ballade>, op. 19

Gaby Casadesus (pf), Orchestre Lamoureux, Manuel Rosenthal (cond). 2분 55초부터 전개 참고

"역시 베르뒤랭 야회에서 소악절은 넋을 빼놓을 듯한 포레의 어느 피아노곡이기도 하다오."

"악절은 느린 리듬으로 여기저기 다른 곳으로, 고결하고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어떤 뚜렷한 행복 쪽으로 그를 향하게 헀다. 그러다 갑자기 그 미지의 악절이 도달한 지점, 그가 악절을 따라가려고 마음먹었던 그 지점에서 잠시 멈추더니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더욱 빠르고 가늘고 애절하고 끊어짐 없고 부드러운, 새로운 움직임으로 미지의 앞날을 향해 그를 데리고 갔다. 그 후 악절은 사라졌다. 스완은 악절을 다시 볼 수 있기를, 세 번째로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자 악절이 다시 나타났다." (2권 47쪽)

 

*유럽인문아카데미 <프루스트 함께 읽기I> 세미나 보충 자료입니다.

9월 23일(목) 세미나에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